FW/직관의 나날

[2011년 4월 24일 광주 VS 서울] 광주원정 패배, 황보관 감독 사퇴, 그리고 결코 알 수 없을 가지 않은 길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4. 27. 17:09


"헉!"
번쩍 눈을 떴다.
배갯잇이 젖을 정도로 땀이 흥건하다.
얼른 손을 뻗어 머리 맡에 놓인 액자를 집는다.
아직도 감동이 가시지 않은, 며칠 전 리그 우승 사진이다.
안도의 한숨이 가슴을 쓸어 내린다.

아직도 종종 사퇴하는 꿈을 꾼다.
실제로 당시 팬들의 비난을 견뎌내지 못했더라면,
단장이 사퇴 의사를 받아들였었다면,
지금의 나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마른 목을 축인다.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나는 황보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트레블을 달성한 FC서울의 감독이다.

"여기서 주무시면 얼어 죽어요."

누군가 어깨를 잡고 흔든다.
눈을 떠보니 공원 벤치에 누워있다.
텅빈 소주병이 굴러 떨어진다.
맞다,
어제 나는 FC서울의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이것이 정말 현실.





지난해 우승팀이 신생팀에게 졌다.

보성에서 한껏 즐긴 봄의 연두빛 속살과 싱그러운 바람,
녹차먹인 돼지와 4년 묵은지의 환상적인 조합,
김태환 선수 부모님의 정이 듬뿍 담긴 홍어회무침과 김밥,
상서로운 봄햇살로 가득 찬 광주월드컵경기장의 분위기 같은
모든 즐거움이 순식간에 빛바랬다.

그리고 광주원정은 'coup de grace(결정적인 한 방)'가 되었다.
황보관 감독은 스스로 물러났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가 있을 수도 있다.
그가 수많은 비난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며
자신의 능력을 차근차근 증명해 나갔으면 어땠을까.
내가 끼적인 소설처럼 트레블까지 달성하는 게 불가능할 거라고 누가 단정할 수 있을까.
새로 부임하는 감독이 누가 됐든 팬들이 원하는 2연패의 길로 FC서울을 이끌어 줄 수 있을까.
FC서울은 오히려 더 표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바라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 보았지만
그 끝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결국 황보관 감독은, FC서울의 팬들은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지켜보는 것밖에 없다.
훗날 이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And both that morning equally lay
In leaves no step had trodden black.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Yet knowing how way leads on to way,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 가지 않은 길, 프로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