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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직관의 나날

[2011년 3월 6일 서울 VS 수원] K리그 개막 - 패배에 대처하는 서포터즈의 자세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3. 6.





3월 6일은 절기 상으로 '경칩',
개구리가 긴 겨울잠에서 깨어 봄을 알린다는 그 날이다.
그리고 이 날은 EPL로 근근히 연명하던 겨울이 끝나고,
경기장에서 직접 축구를 볼 수 있는 K리그 개막날.

그것도 지난 여름 홀로 빗속을 헤치면서도 수원으로 달려가게 만들었던,
경기장을 가득 채운 함성과 열정으로 가슴 뛰게 했던 바로 그 경기, 
서울과 수원의 더비전이다.



이 날을 위해서 시즌티켓도 사고,
수호신의 소모임에도 가입하여
열혈서포터로 거듭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경기 시작 2시간 전,
유니폼과 챔피언 머플러를 사서 경기장으로 들어선 냐냥과 나는
처음 서포터즈석에 서는 것에도 불구하고
얼떨결에 가장 중심자리에 앉아버렸다.

경기 시작 전부터 수호신과 그랑블루는 기싸움을 시작했고,
경기장의 분위기는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냐냥은 주말에도 일한 탓에 2시간 수면의 방전된 육신으로
때이른 토오픈 슈즈를 신고 와서 발이 시리다, 졸립다를 연발했지만
우리는 오랜만에 직관하는 경기에 대한 기대감으로 두근거렸다.

선수 소개가 시작되었고,
장내 아나운서가 주절주절 떠드는 바람에
종이를 들고 있는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지만,
우리가 만들어 내는 카드섹션이 화면에 보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하면서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까지는 정말,
내가 머리 속에 그렸던 시나리오대로
전개된 아름다운 개막전이었다.






하지만 그 핑크빛 개막전이 잿빛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대성은 부상으로 결장했으며,
F4라고 일컬어지며 개막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서울의 용병들은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서울은 허리싸움에서 밀리기 시작하더니
결정적인 골들은 수비수 마토와 골키퍼 정성룡에게 모두 막히고,
수원은 며칠 전 챔스리그 수원과는 180도 다른 팀이 되어
전반과 후반에 한 골씩을 뽑아내면서 승리를 차지했다.
그랑블루는 홈구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껏 기세가 올라서
어마어마한 서포팅을 수원 선수들에게 보냈다.

글을 쓰는 이 순간도 수원이 골을 넣었던 순간들은
주원이가 엘리베이터 사고 순간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처럼 잘 기억나지 않는다.
경기가 끝나고 그 허무한 느낌은 정말......
남의 잔치에 안방을 내어주고, 밥상까지 차려준 격이었다.
원정팀의 무덤이라는 서울 홈 19연승의 꿈은 그렇게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내가 더욱 아쉬우면서도 분했던 것은
서울의 패배를 대하는 서울 서포터즈, 수호신의 자
였다.

비록 난생 처음 얼떨결에 서포터즈석 중심에 서게 된 우리였지만,
낯선 구호와 립씽크에 불과한 응원가일지라도 최선을 다해 외쳤다.
하지만 두번째 골이 들어갔을 때
수호신 응원석의 소리는 급격히 작아졌고,
자리에 못박힌 듯 서서 경기장만 멍하니 바라보기 시작했다.
처음 서포터즈석에 서보는 내가 이렇게 느꼈을 정도니까
그랑블루가 보기에도, 중립관객들이 보기에도 그랬을 것이다.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수호신은 경기에서도 서포팅에서도 졌다.
솔직히 아직 늦지 않았으니 수원으로 갈아타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홈에서 져본 기억이 가물가물한 수호신은,
그것도 라이벌 수원에게 완패를 당한 수호신은,
패배에 대처하는 방법을 잊어버린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포터즈석, N석에 앉는다는 것은
팀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지지를 보낼 것을 약속하는 것
이다.
팀이 지고 있건 이기고 있건 변함이 없어야 한다.
아니, 오히려 팀이 지고 있을 때,
일반관객들이나 선수들마저 패색이 짙을 때,
다시금 열정을 일깨우고 희망을 불어넣는 것이 바로 서포터즈라고 생각한다.
90분 동안 서서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치고, 구호를 외치는,
그래서 경기가 끝난 후 선수들이 가장 진심을 다해 열정적으로
감사의 마음을 보내는 곳이다.

내가 리버풀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리버풀 서포터즈, 콥의 열정적인 응원 때문이다.
2004-05 챔스리그에서 0:3으로 뒤지며, 후반전을 시작하는 시점에도
콥은 YNWA을 부르며 리버풀에 무한한 지지를 보냈다.
0:3으로 뒤지던 경기를 동점으로,
다시 승부차기에서 승리로 바꾼 그 힘의 바탕에는
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열심히 했지만 지는 경기는 있어도
열심히 했지만 지는 서포팅은 없다.



K리그의 발전을 위해서도,
축구팬들의 즐거움을 위해서도,
두 팀간의 경쟁구도는 더 격화되어야 하고,
더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서로를 증오하고 만나면 으르렁거리며
이기기 위해 독을 품고 악을 쓰면서도
결국에는 긍정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
2011 시즌은 이제 겨우 시작이지.

그러기에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FC서울의 진보를,
수호신의 행보를,
지켜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