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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직관의 나날

[2011년 3월 12일 대전 VS 서울] 첫원정, 열정있고 따뜻했던 수호신 사람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3. 18.



오전 11시, 서초역.
하나의 목적을 가진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K리그 2R FC서울과 대전시티즌의 경기를 보러가기 위한
FC서울의 서포터즈다.
오늘 원정차량은 4대.
상암에서 10시에 출발한 차들은 11시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지만, 아직이다.

처음 원정응원이란 것을 가보게 된 나는
기대감과 동시에 부담감을 느낀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어간다는 것은
즐거움인 동시에 스트레스이기도 하다.
(냐냥은 주말에도 출근하는 관계로 대전원정길에 함께 나서지 못했다.)
지금 가방에는 캔맥주 2개와 감자칩 과자, 치즈맛 소지지들이 수줍게 들어있다.
옆자리에 누가 앉게 될지는 모르지만,
빨리 친해지는 방법은 뭐니뭐니해도 술이니까.

버스를 기다리던 같은 소모임 분들과 가볍게 이야기를 나눈다.
지난 수원전에 관한 화제를 꺼내자 어색한 사이지만 이야기가 술술 풀린다.
모두들 대전전에 대한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쏟아낸다.
이야기가 끊어질 즈음, 적절한 타이밍에 버스는 도착하고,
나는 버스에 타자마자 재빠르게 앉아있는 사람들을 스캔한다.
군대든, 회사든, 새로운 조직에 쉽게 적응하기 위해서는
성격좋고 파워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이 필요하다.
나는 아까 함께 얘기를 나눴던,
인상좋고 소모임에서 힘 좀 쓸 것 같은 언니 옆에 앉는다.




나의 선택은 탁월했다.
소모임의 회장님과 부회장님이 와서 먼저 인사를 한다.
신입이냐며 반겨주시며 캔맥주를 건넨다.
공짜란다.
사람들이 참 따뜻하고 순수한 것 같다.
옆자리에 앉은 쌍둥이 자매는 안주로 과자를 건넨다.
나도 이때다 싶어 준비한 소시지와 감자칩 과자를 꺼낸다.
주고받는 과자 속에 꽃피는 情.

1시간쯤 가자 휴게소를 들린다.
휴게소에서 머무는 시간은 30분 내외.
따로 식사할 시간이 없으니 여유롭게 식사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휴게소에서도 온정은 계속 이어진다.
핫바 하나, 아이아스크림 하나, 햄버거 하나를 사도 나눠주고 먹는다.
나도 평소보다 커다란 선물용 호두과자를 사서 한 알씩 나눠준다.

어느 정도 배가 차서 만족스러울 즈음,
수호신 의장 모임인 '타나토스'가 우리 버스가 오른다.
새로 나온 응원가를 가르쳐 준단다.
녹음해온 노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강력한 라이브 요청에 선뜻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의 선창을 듣고 모두들 따라 부르기 시작하며 버스가 들썩인다.

같은 팀을 응원하는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유대감이 생긴다.
이것 또한 멋진 순간이다.





2시간이면 도착하는 대전원정은 수원, 성남, 인천을 제외한다면 껌이다.
유성IC를 지나자 마자 곧바로 보이는 대전월드컵경기장.
국내 최초의 반개폐식 지붕을 가진 40,401석 규모의 경기장이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월드컵 최고의 경기로 손꼽는 이탈리아와의 8강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4강 진출을 결정짓는 안정환 선수의 골든골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주변의 담장은 당시 시민들의 카툰과 메세지가 담긴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흥미롭다.  




경기장에 도착한 시각은 2시 30분 경.
휴게소에서 너무 먹고 놀았나 보다.

경기장에 들어서자 마자 나는 세 번 놀란다.
첫째는 경기장의 관람감.
축구경기장이라고는 서울월드컵경기장과 수원월드컵경기장이 전부인 내게
대전월드컵경기장은 EPL의 작은 경기장 못지않게 선수들이 가깝게 느껴진다.
둘째는 대전시민들의 축구에 대한 관심.
생각보다 많은 관객들이 들어찬 축구장에 가슴이 뿌듯하다.
(나중에 뉴스로 봤더니 32,340명으로 이날 펼쳐진 네 경기 중에 가장 많은 관중이 들었다.)
셋째는 날씨.
봄날과 같은 날씨는 반팔 유니폼만 입고도 춥지 않을 정도다.






서울의 경기력이 이 날씨만 같으면 얼마나 좋겠냐만,
여전히 모든 것이 불안하고 어색하다.
그래도 후반으로 갈수록 경기력이 안정되고,
선제골을 먹었지만 동점골(비록 자책골이지만)을 넣고 무승부로 가져간다.

하지만 예전에는 승점자판기라 불렸던,
가난한 시민구단이었던 대전이 바뀌고 있다.
1R에서 비록 연식은 오래되었지만,
국대 멤버들이 즐비한 울산을 2:1로 이긴 것도 그렇고,
두 번의 프리킥골에 이어 이번에도 골을 기록한
1987년산 메이드 인 브라질,
박은호 선수의 몸놀림은 예사롭지 않다.
또한 서울의 무수한 공격을 막아낼 정도로 수비조직력도 좋다.

이번 시즌 K리그는 정말 한치 앞을 모르겠다.
EPL처럼 평준화되고 있달까.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상향평준화,
걔네는 하향평준화.




무승부의 경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아닌,
관 때문에 여전히 걱정 반, 기대 반이다.

그래도 빅재미 준 사건 하나.
고속도로로 빠져나가는 길,
불법주차해놓은 차들때문에
1호 버스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다.
곧이어 1호차 밖으로 우르르 나오는 타나토스.
금세 차를 번쩍 들어 인도 쪽으로 바짝 붙인다.
그리고 유유히 빠져나가는 버스.
남자다!
멋있다!

그래!
이렇게 젊고 건장한 청년들이 서포팅하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오늘 원정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독려하는,
지칠줄 모르던 수호신 서포팅을 보며,
지난 수원전에서의 실망감을 날려버린다.

열정있고, 패기있고, 따뜻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지지하는 팀이 바르게 가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