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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직관의 나날

[2011년 3월 25일 온두라스전] 조광래식 순정만화축구와 축구장으로 돌아온 오빠부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3. 27.



언제부터인가 조광래호의 축구를 '만화축구'라고 하더라.
'골킥을 딱- 패스를 딱딱딱딱딱-드리블을 딱-슛을 딱-'
패스로 점유율을 높여서 경기를 완전히 지배하는,
말 그대로 '만화같은' 축구를 지향한다는 건데......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지향점이지,
현실에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잖아.
패싱플레이로 경기를 지배하려면
선수들이 한솥밥을 먹어 가며 몇년을 같이 굴러야 가능할텐데,
평가전이나 대회가 있을 때만 모이는 국가대표팀에서
이런 축구를 구사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잖아.

그래도 온두라스와의 경기에서 '만화축구'의 실마리를 보았다고나 할까.
물론 온두라스가 약한 상대라서 경기를 쉽게 풀 수 있었던 덕도 있지만.

그런데 말이야,
나는 지금까지 조광래식 만화축구 장르가 '스포츠'인 줄 알았는데,
오늘 가서 보니까  '순정' 만화축구더라구.
경기장에 여중고생들이 어찌나 많이 왔던지.
우리도 담요준다는 말에 며칠을 고민하면서 결제했던
7만원짜리 특석에도 여고생들이 줄줄이 앉아있더라.
2010년 월드컵에 이어서 아시안게임, 아시안컵까지
외모 준수하고 실력도 못지않은 선수들이 언론에 많이 노출된 때문인 듯.



온두라스전 티켓의 뒷면. 순정만화축구의 대표주자인 기성용, 이청용, 구자철의 모습이 있다. 그런데 이 사진을 선정한 사람은 아무래도 이청용의 지능형 안티같다.

'이청용 오셨성용?'과 '박주영 골 좀 넣어주영'은 이미 유명세를 탄 플래카드. 거칠고 강한 남자냄새만 나던 경기장에 소소한 즐거움을 주었다. 



엔트리를 소개할 때도 '기성용, 이청용, 박주영'이 나오자
함성소리 톤이 '와-'에서 '꺄-'로 바뀌더라구.
Ki군이 코너킥이라도 차러 갈 때면
순식간에 축구장이 콘서트장으로 변해버리더군.
내 뒤에 앉은 남자 사람들이 "저 빠순이들!"이라고
노골적인 불쾌감(혹은 질투)을 표현했어. 

하지만 축구장의 응원소리가 '와-'든 '꺄-'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비록 얼빠에 불과할지라도
추운 평일 저녁에 경기장을 찾아준 여중고생들 때문에
A매치 경기 관중이 그나마 체면치레라도 한 거잖아.

이 친구들이 아직은 축구 룰도 모르고,
얼굴만 보고 좋아한다지만,
조만간 축구에도 관심갖고 K리그도 오고 막 그럴 거란 말이야.
그리고 그 선수가 팀을 떠나도 계속 서포팅하게 될지도,
나중에 남편과 아이 손을 잡고 축구장을 찾을 지도 모른다구.
나부터 Ki군 외모보고 축구에 더 관심갖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몇 달만에 FC서울 지방원정까지 따라가는 팬이 되었잖아. 

축구라는 스포츠,
자기 방식대로 어떻게든 즐겁게 즐기면 되는 거 아닌가.


어쩌면 안정환, 이동국, 고종수가 있던 그 때처럼
프로축구 제2의 르네상스가 올지도 모르겠어.
윤빛가람이나 지동원, 홍정호, 유병수, 김주영과 같은
더 젊고, 더 잘생기고, 더 실력있는 축구선수들이 쭉쭉 계속 발굴되고,
유럽진출보다 K리그에 좀더 오래 머문다면 말야.

어쨌든
조광래식 순정만화축구를 보러 축구장으로 돌아온 오빠부대들,
Bienvenidas!!!


대포 카메라를 살 능력이 없는, 가난한 집 첫째딸인 냐냥과 나는 똑딱이로 찍은 탓에 그나마 쓸만한 사진은 이것 밖에 없다. 백넘버로 선수를 알아봐야 하는 이 슬픔. 차라리 찍지 말고 한 번이라도 더 볼 걸.


이 날의 또다른 수확. 7만원짜리 특석 티켓으로 받은 담요와 프로그램북, 멤버십 카드 가입하고 받은 문구세트. 원정갈 때 버스에서 덮을 담요가 필요했는데 폭닥하고 두툼한 것이 나쁘지 않다.